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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목소리, 죽는 날까지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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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인터뷰]테너 신형섭 성악가
고3 때 시작해 강릉대 음대 졸업
이탈리아 치따 디 이제오 국제콩쿠르 2위
2016년 뇌경색으로 쓰러져...활동 중단
지난해 '이 세미(I Semi)앙상블' 창단
툴뮤직 주관 제4회 장애인콩쿨 성악1위
"죽는 날까지 하나님 찬양하고 싶어"

■ 방송 : 강원영동CBS <미션인터뷰>(주일 10:05~10:30)
■ 채널 : 표준 FM 91.5MHz
■ 진행 : 최진성 아나운서
■ 출연 : 테너 신형섭 성악가
테너 신형섭 성악가. 최진성 아나운서

 


◇ 최진성> 가슴 벅찬 그 꿈을 향해 내딛는 걸음. 그 걸음을 떠올리면 생각만 해도 설레죠. 하지만 그 길을 가는데 있어서 늘 위기는, 어려움은 가장 가까이에 또 급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캄캄함 속에서 다시 빛을 찾아 걸음을 이어가는 그런 삶을 보게되는데요. 오늘 그 삶의 이야기 주인공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오늘 미션 인터뷰는 성악가 테너 신형섭 집사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신형섭>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장애인 성악가 테너 신형섭입니다.

◇ 최진성> 성악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던 거예요?

◆ 신형섭> 굉장히 단순 하고요. 제가 노래를 처음 시작한 건 고 3 때 시작을 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 대학을 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상업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당시 상업 고등학교에서는 대학 가는 게 쉽지 않은 그런 거여서 단지 대학을 한번 가고 싶다 그런 꿈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최진성> 아니, 근데 대학을 갖고 싶어서 노래를 시작했다 하는 건 그 당시에 이미 내가 노래를 좀 잘 한다 라는 생각이 있으셨던 거죠?

◆ 신형섭> 그랬었죠. 하하(웃음). 아주 어릴 때 초등학생 때부터 꿈은 가수였습니다. 일반 대중가수. 근데 제가 지금은 살이 많이 빠졌지만 엄청 뚱뚱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비주얼상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가수의 꿈은 접었고요.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거나 찬양을 할 때는 노래가 굉장히 잘됐습니다. 고음도 잘 나고 그러다가 박종호 장로님의 찬양을 듣고 따라하면서 성악쪽에 좀 재능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죠. 근데 제가 워낙 학과 성적도 낮았었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고3 5월 때쯤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나갈 수 있는 도 대회, 강원도 실기대회 이런 데서 제가 1등도 한 2번 정도 하고요. 자신감 충만했죠. 교만 했었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 최진성> 그렇게 대학진학 후 유학까지 이어졌습니다. 직접 좀 들어 보고 싶어요.

◆ 신형섭> 대학을 처음에 꿈꿨던 것처럼 그냥 성악과면 당연히 이탈리아 정도는 한번 가 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것 또한 제 맘대로 잘 안 되더라고요. 제가 졸업을 하고 8년정도 좀 놀기도 하고 일도 하면서 그렇게 좀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뭔가 나이는 30대로 넘어들어섰고요. 당시에 뭔가는 좀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고 생각을 해 가지고 과감히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두려움이 많았었지요. 처음에는 계속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소리도 곧잘 낼 줄 알고 괜찮은 것 같은데 처음에 가서 도전했던 콩쿨, 학교, 시험들 다 떨어졌습니다. 그 기간이 한 2년 정도 됐죠. 외국 나가서 한국은 다시 들어오기 싫고 어떻게든 버텼습니다. 굶으면서. 아마 유학 하셨던 분은 대부분 공감하실만한... 누구나 다 고생했겠죠. 배고픔이 제일 컸던 것 같습니다. 먹는 거 아껴서 레슨 한번 더 가려고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테너 신형섭 성악가. 신형섭 제공

 


◇ 최진성> 조금씩 조금씩 나아짐을 느끼면서 흔히 얘기하는 빛을 보는 순간 있잖아요.

◆ 신형섭> 대략 한 3년 정도 지났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 개인레슨 맡던 선생님께서 어느날부터 "너 콩쿨 저거 한번 해 볼래?" 이런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도전을 하고 맨 처음 갔을 때는 예선전부터 아예 통과를 못 했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선생님이 제안을 하시고 나갔던 콩쿨부터 예선을 통과하는 겁니다. '어? 배웠던게 조금씩 되네?' 그런 자신감이 생겼고 그 때쯤에 학교도 합격을 했었습니다. 제가 지금 프로필에는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 이라고 적지만 처음 학교 입학을 했던 것은 베르가모에 있는 음악원이었습니다. 일들이 술술 좀 풀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중에 다른 콩쿨을 도전을 하게 돼 가지고 제가 다행히도 2등이라는 성적을 거둔 적이 있었습니다.

◇ 최진성> 목표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떠셨어요?

◆ 신형섭> 제가 유럽에서 이탈리아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듣던 얘기가 이탈리아에도 너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 라고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제일 중요한 얘기는 "어? 너 돈 잘 벌겠다..."

◇ 최진성> 그 얘긴 어떤 얘기예요?

◆ 신형섭> 제가 갖고 있는 목소리가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사람들조차도. 제 목소리가 강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탈리아에서 요즘에는 흔치 않은 목소리이기도 하고 맡을 수 있는 오페라의 배역들이 어려운 배역들이 많이 있다고 그래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그런데 실제 소화 할 수 있는 가수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희소성이 있는 거죠. 그러면서 저도 국내로 귀국 하는 게 아니라 유럽에서 활동을 하고 싶다 라는 꿈이 더 생겼습니다.

◇ 최진성> 그렇게 잘 가고 있던 상황에서 위기가 찾아왔다고요.
연주활동 모습. 신형섭 제공

 


◆ 신형섭> 제가 현재 뇌경색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왼쪽편마비를 겪고 있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의사소통이 되게끔 말도 할 수 있고 제가 움직이긴 하지만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장애인입니다.

◇ 최진성> 그 당시 과로 하셨던 거예요? 어떻게 병을 알았던 거예요?

◆ 신형섭>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베르가모 학교를 다니다가 전학해서 베르디 밀라노 음악원으로 왔습니다. 첫 수업을 가는 날에 증상이 나왔어요. 좀 간과했었죠. 그리고 외국이다 보니까 치료비 문제같은 것들 때문에 병원에 바로 못갔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정도 그냥 집에서 버티다가 뒤늦게 병원에 갔는데 그때는 이미 왼쪽 신경이 다 마비가 된 상태로 간 거라 후유증이 조금 심하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 당시에 제가 깨어나서 전해 듣기로는 이탈리아에 계신 의사선생님들께서 일어날지,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고 일단은 목숨만 살려놓겠다고 했답니다. 이 친구가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뭐 그것도 장담을 못 하겠고 일단은 살려만 놓겠다고 얘기를 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전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누워서 '아 휠체어를 탔으면 좋겠다' 시간이 좀 흘러서 휠체어를 탔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좀 걸었으면 좋겠는데, 섰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아무래도 제가 가수이다 보니까 '노래가 좀 됐으면 좋겠네' 노래가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혼자 발성연습을 하는데 한 옥타브가 채 나지 않았어요. 이탈리아 간호사들이 제가 노래를 하니까 노래를 해 봐 해 계속 하라고...하지만 안 되니까 제가 되던 곡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에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이제 내 인생은 이제 끝났구나 그렇게 느꼈었죠. 그리고 그 다음에 제가 16년도에 쓰러지고 17년도에 귀국을 했었습니다.

◇ 최진성>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어떤 시간들을 보내셨어요.
테너 신형섭 성악가. 신형섭 제공

 


◆ 신형섭> 우선 귀국하고 제가 1년 동안 서울, 경기도에 있는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내려왔죠. 더 이상 뭐 재활치료를 한다고 해서 나아질게 없다고 판단도 되고 몸을 끌고 다닌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큰 범주안에서 걷는 다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그냥 몸을 끌고 다니는 그런 형편입니다. 귀국하고 한 3년, 올해 포함해서 3년 전쯤인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할 줄 아는 게 제일 잘 하고 제가 제일 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이 워낙 좁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동네이기도하고 그러면 혹시나 음악 행사가 들어오면 그래도 노래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학’이란 노래를 연습을 했습니다. 제가 테너 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전에 모래시계 나왔던 주제가 아시죠.그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제가 잘 아는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이 계셨거든요. 그래서 상담을 드렸죠 "말은 되는데 한 옥타브 이상 잘 안 나는 것 같아요." 저는 성대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그런 말씀 드렸던 거였거든요. 근데 거기서 말씀하시길 발음이 약간 뭉개지는건 있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성대에 문제는 없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성대가 워낙 강해서 웬만해서는 목도 잘 쉬지 않았어요. 그 말씀을 믿고 그냥 연습을 했죠. 교회에서. 생각보다 소리가 잘 나는 겁니다. 고음을 낼 수 있게끔 연습을 많은 시간을 들여서 했었습니다. 생각보다 잘 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희망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이 정도 소리가 나면 가끔 노래도 할 수 있고 생계에 관련된 부분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이 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쯤 살아도 되겠구나 정말 절망적이었거든요. 제가 속초에 살고 있는데 고향에 다시 내려왔을때는 횡단보도 건너는게 너무 힘든 겁니다. 제가 모르는 어떤 타인들이 저를 보는 시선들이 두려워서 횡단보도 건너려고 하면 몸이 굳어져서 못 건너겠더라고요. 얼마나 힘든지요. 항상 매일 뭐 죽고 싶다 생각하고... 저희 집이 10층인데 떨어지면 바로 가겠는데 근데 저 난간을 어떻게 넘어가지 하나님이 저를 살리시려고 그랬나 봐요. 죽고 싶은데 난간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살리려고 그런 마음 못 먹게 이렇게 하셨나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 최진성> 앙상블을 창단 하셨어요. '이 세미(I Semi) 앙상블'. 이것이 단순한 공연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또 다른 목적도 있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

◆ 신형섭> 일단 '이 세미' 라는 말이 이탈리아 말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했고 앙상블의 대표로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말로 씨앗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고향에 좋은 연주자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들을 모아서 속초 문화발전에 씨앗 같은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조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최진성> 창단연주회를 작년에 가지셨죠. 어떠셨어요 그때?

◆ 신형섭> 평가는 관객들이 해 주셔야 되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나름 성공적인 연주회가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성악도 있고 악기도 있고 함께 어울리는 앙상블도 있었고요. 우선 저희 앙상블이 하려고 하는 일은 한 세 가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첫 번째는 일단 제가 무대에서 노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러 주기만 기다려보니 안 불러 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내가 한번 만들어 볼까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했고요. 두 번째는 저를 비롯한 저희 지역에 있는 음악가들 속초 뿐만 아니라 가까운 강릉 동해 여기 계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지역 출신 음악가들 혹은 타지에서 오셨지만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음악가들의 인권신장과 처우개선 등을 좀 바꿔 보고 싶어서 했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그런 거창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고 그런 뜻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최진성> 최근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한 단체에서 주관한 제 4회 장애인 음악 콩쿠르에서 일반부 1위의 성적을 거두셨어요. 축하드립니다.

◆ 신형섭> 감사합니다. 이 대회는 서울에 있는 툴뮤직이라는 곳에서 주최를 한 것이고 사회적기업으로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가 어쨌든 살려고 활동을 하기 위해서 찾아보던 중에 장애인 콩쿨을 알아 보게 됐습니다. 이 콩쿨에 참가해 보고싶어서 작년에는 시기를 놓치고 올해 참가를 했습니다. 근데 감사하게 좋은 결과가 생겼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정규과정을 다 공부를 했고 더군다나 외국에서도 공부를 조금이나마 했고요. 그런 입장에서 콩쿨에 참가하다보니 물론 제가 편법이나 불법을 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 좀 많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그렇습니다.

◇ 최진성> 그리고 수상소감이 기억 나요. 사회로 나아가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계기를 가진 거 같더라고요. 어떤 의미였는지.

◆ 신형섭> 어쨌든 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죠. 제가 지금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고 재정적으로도 그렇고 그런 부분들이겠죠. 제가 지금은 노동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환경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번 계기로 해서 일단은 어떤 음악회라든가 이런 자리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그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까 세상에 한 발자국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있는 중입니다.

◇ 최진성>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잖아요.

◆ 신형섭> 저는 속초장로교회 출석하고 있습니다.

◇ 최진성> 신앙인으로서 음악이라고 하는일,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이렇게 노래하는 것 이게 또 연관이 있을까요?

◆ 신형섭> 음악 하는 사람들은 저도 그렇지만 아마 80% 이상은 교회를 통해서 음악을 처음 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그리고 제가 앞에서는 말씀을 안드렸지만 제가 음악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음악을 하려고 하는 이런 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 정말 생각이 되고요. 저는 솔직히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어디서 제가 너무 신실한 사람이고... 그렇게는 제가 솔직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근데 제가 처음 노래를 하면서 성악을 시작을 하면서 정말 막연 했거든요. 아무것도 보장되는게 없었고 그럼에도 제가 그 당시에 고3 때 서약을 한게 있었습니다. 혹시나 음대를 못 가더라도 제가 죽을 때까지 제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라고. 저 혼자만의 마음으로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갈 때도 어떤 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지만 그저 그냥 하나님 저 유학이란 것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목소리를 주셨으니까 한번 책임져 주세요. 그런 마음이었고요. 장애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프고 나서도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왜 나에게 더구나 후천적장애인은 정말 세상이 정말 깜깜해진다고 하더라고요.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근데 어느 날부터 소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삶의 희망이 생기고 한줄기 빛이 보였고요. 어떤 분들은 저한테 이러시더라구요. 잘 모르는 어떤 분들이신데 "선생님 하나님이 선생님을 되게 많이 사랑하시는 거 같아요" 그러시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랑하시는데 나를 이렇게 해 놓나' 근데 요즘에 또 드는 생각이 나는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지금 나에게 이렇게 기회를 자꾸 주실까 나는 무엇을 해야 될까 자꾸 요즘에 그런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대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저를 어느 곳에서 어느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 쓰실지 내일이 기대가 되고 제가 장애인 콩쿨에서 1등 할 줄도 몰랐고 이게 인연이 돼서 또 우리 아나운서님과 이렇게 인터뷰하기 될지도 몰랐구요. 그래서 내일이 혹은 다음 달이 내년이 계속 기대가 되고 있습니다.

◇ 최진성> 마지막으로 음악가가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시죠.
테너 신형섭 집사는 "제가 갖고 있는 목소리로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최진성 아나운서

 


◆ 신형섭> 제가 처음 노래할 때 하나님께 제가 혼자 서약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찬양을 하면서 살겠습니다 라고 했던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고 싶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겼던 것 만큼 그 주최했던 회사의 소속 아티스트가 돼서 열심히 음악가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세상을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과 바람이 있습니다.

◇ 최진성> 음악가로서 성악가로서 의미있는 활동들 기대하겠습니다. 신형섭 집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시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신형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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